그는 시장이라는 것도 고대에는 없었다고 한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는 [증여론]에서 시장 대신 포틀래치(potlatch)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제도는 언뜻 물물교환처럼 보이지만 시장으로서 기능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체제, 즉 선물을 주고받는 체제의 일부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시장을 당연시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고 소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폴라니에 의하면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1750년경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지금과 같은 시장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지금은 자유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며, 사람의 노동력도 수요공급 법칙에 따라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된다. 이는 자본주의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116
20년간의 노동으로 돈을 비축했을 수는 있으나 노동 자체는 비축할 수 없다. 즉 노동은 인간의 활동 자체이지, 비축 가능한 상품이 아니며 인간과 분리될 수도 없다. 그런데 자신과 분리시키고 상품처럼 사고팔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이고 그리고 이 소외는 불행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117
.... 설사 안정적인 일터에서 즐겁게 일한다고 해도 일하는 우리는 노동시장의 상품이다. 그리고 상품가치는 언제나 변동하며 불안정하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라는 비슷비슷한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라는 주문인데, 자신이 상품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시장 상황에 따라 언제나 가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상품의 의미로 노동을 제공하는 한 "안정적인 일터"는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수요.공급의 일치를 말할 뿐 자신의 원래 모습의 반영이 아니다. 자신은 노동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시장에서 상품일 뿐 인격이 아니다.
119
앞의 폴라니의 발언 중 "현실의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1차대전 후 독일의 지폐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도배지로 쓰였다. 땔감을 사느니 돈을 태워 몸을 덥히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다. 즉 금융 메커니즘이 붕괴한 것이다.
화폐는 씨스템의 징표일 뿐인데 왜 이것이 행복을 위협하는가? 구매력을 의미하는 돈은 숫자로 표시되며, 숫자는 추상이기 때문에 아무리 쌓여도 실감할 수 없다는 데 원인이 있다. 옛날에는 부자를 만석꾼이라 불렀다. 곡식이 창고에 가득하는 의미였다. 화폐가 지금과 같은 씨스템에서 작동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물건을 많이 쌓아둔 사람이 부자였다.
오늘날 돈은 기본적으로 통장에 찍히는 숫자다. 이 숫자는 쌀이 아니며 빵이 아니다. 그저 숫자일 뿐이다. 하지만 씨스템의 보장으로 쌀이나 빵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갖는다. 문제는 창고는 한정되어 있지만 통장의 숫자는 무한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무한이라는 숫자를 채울 수 없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만족이라는 개념이 없다. 부자라 할지라도 만족하지 않고 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으며, 노력에 따라 숫자를 크게 늘릴 수는 있어도 항상 더 큰 숫자가 있기에 만족할 수 없다. 이것이 비극의 원천이다. 데릭 젠슨은 [거짓된 진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경제(그리고 우리 사회)의 기초는 추상화다. 우리 경제 체제의 보상은 돈으로 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단지 어떤 가치가 있다고 사회 전체가 동의하는 숫자일 뿐이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한 추상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문화의 보상으로는 소유욕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한다. 아귀처럼, 우리는 세상을 먹어치우지만 배부른 줄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우리가 평생 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쌓아둘 수 있다. 그러나 은행 통장에 얼마나 높은 수까지 기록될 수 있는지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부를 축적하는 사람은 더욱더 많이 축적하는 것으로 계속해서 보상을 받는다."
121-122
추상화가 극에 달한 시대, 돈을 숭배하는 시대에 양극화 문제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행복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점점 더 부자와의 격차가 벌어지는 사회에서, 더욱더 부자가 되는 사람을 제외하고 누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부자라고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양극화 문제는 자본주의가 처음부터 품고 있던 문제였다는 것은 앞선 폴라니의 말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결국 두 개의 다른 민족이 생겨난 것이다. 전대미문의 부가 전대미문의 빈곤과 불가분의 하나라는, 당대의 사유하는 정신이라면 실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사태가 현실로 판명되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 역시 초기에 제시되었다. 그것은 기부이다. 폴라니는 벤섬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사회의 번영이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다수의 시민들은 자기들의 일상 노동 이외에는 별 자원이 없게 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항상 가난한 상태로 수렴해갈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이들의 결핍을 메워주기 위해 정규적인 기부제도가 확립되어야만 한다"고 제안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되면 "이론상으로는 결핍이 줄어들어버리기 때문에 결국 산업이 타격을 입을 것이다"고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산업을 위해서는 굶주림이라는 육체적 제재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결핍 상태를 증대시키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과제라는 것이다."
기부가 충분해서 결핍이 해소되면 갑싼 노동력 확보에 문제가 생기므로 정부는 결핍 상태를 어느 정도 유지해야 한다는 벤섬의 이야기는 다소 가혹해 보인다. "어느 정도"라고 했지만 실제로 벤섬은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냉혹하게 들리는 이 말에는 일말의 진실도 담겨 있다. 오늘날 빌 게이츠 같은 부자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기부하지만 좀처럼 가난이 해소되지 않는 현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29-130
[증여론]에 의하면 포틀래치에서는 파산할 정도로 베푸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한다. .... 이것은 무사무욕(無私無慾)한 행위는 아니다. "추장과 가신 사이, 가신과 그 추종자 사이에는 이러한 증여에 따라 위계서열이 확립된다. 준다는 것은 자기의 우월성, 즉 자기가 더 위대하고 더 높으며 주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답례하지 않거나, 더 많이 답례하지 않으면서 받는다는 것은 종속되는 것이고, 손님 또는 하인이 되는 것이며, 작아지는 것이고 더 낮은 지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131
부의 축적은 양극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데 이를 완화하는 방책 중 하나가 기부이다. 하지만 기부는 결코 기본구조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포틀래치 같은 방식이 아니라면 기부는 공리주의의 술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32
기부와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기부가 받는 사람에게 모욕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매년 100명 정도가 굶어죽는다고 한다. 경제대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사(餓死)를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꽤 많은 사람이 자존심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로 등록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제도만으로 인간의 심리를 다스릴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33-134
이런 염려는 마르셀 모스도 하고 있다. "자선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는 더욱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도덕적인 노력은 부유한 '보시가(布施家, aumonier)의 무의식적이며 모욕적인 후원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134
탁석산, 행복스트레스, 창비
우리는 지금의 시장을 당연시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고 소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폴라니에 의하면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1750년경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지금과 같은 시장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지금은 자유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며, 사람의 노동력도 수요공급 법칙에 따라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된다. 이는 자본주의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116
20년간의 노동으로 돈을 비축했을 수는 있으나 노동 자체는 비축할 수 없다. 즉 노동은 인간의 활동 자체이지, 비축 가능한 상품이 아니며 인간과 분리될 수도 없다. 그런데 자신과 분리시키고 상품처럼 사고팔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이고 그리고 이 소외는 불행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117
.... 설사 안정적인 일터에서 즐겁게 일한다고 해도 일하는 우리는 노동시장의 상품이다. 그리고 상품가치는 언제나 변동하며 불안정하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라는 비슷비슷한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라는 주문인데, 자신이 상품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시장 상황에 따라 언제나 가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상품의 의미로 노동을 제공하는 한 "안정적인 일터"는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수요.공급의 일치를 말할 뿐 자신의 원래 모습의 반영이 아니다. 자신은 노동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시장에서 상품일 뿐 인격이 아니다.
119
앞의 폴라니의 발언 중 "현실의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1차대전 후 독일의 지폐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도배지로 쓰였다. 땔감을 사느니 돈을 태워 몸을 덥히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다. 즉 금융 메커니즘이 붕괴한 것이다.
화폐는 씨스템의 징표일 뿐인데 왜 이것이 행복을 위협하는가? 구매력을 의미하는 돈은 숫자로 표시되며, 숫자는 추상이기 때문에 아무리 쌓여도 실감할 수 없다는 데 원인이 있다. 옛날에는 부자를 만석꾼이라 불렀다. 곡식이 창고에 가득하는 의미였다. 화폐가 지금과 같은 씨스템에서 작동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물건을 많이 쌓아둔 사람이 부자였다.
오늘날 돈은 기본적으로 통장에 찍히는 숫자다. 이 숫자는 쌀이 아니며 빵이 아니다. 그저 숫자일 뿐이다. 하지만 씨스템의 보장으로 쌀이나 빵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갖는다. 문제는 창고는 한정되어 있지만 통장의 숫자는 무한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무한이라는 숫자를 채울 수 없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만족이라는 개념이 없다. 부자라 할지라도 만족하지 않고 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으며, 노력에 따라 숫자를 크게 늘릴 수는 있어도 항상 더 큰 숫자가 있기에 만족할 수 없다. 이것이 비극의 원천이다. 데릭 젠슨은 [거짓된 진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경제(그리고 우리 사회)의 기초는 추상화다. 우리 경제 체제의 보상은 돈으로 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단지 어떤 가치가 있다고 사회 전체가 동의하는 숫자일 뿐이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한 추상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문화의 보상으로는 소유욕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한다. 아귀처럼, 우리는 세상을 먹어치우지만 배부른 줄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우리가 평생 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쌓아둘 수 있다. 그러나 은행 통장에 얼마나 높은 수까지 기록될 수 있는지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부를 축적하는 사람은 더욱더 많이 축적하는 것으로 계속해서 보상을 받는다."
121-122
추상화가 극에 달한 시대, 돈을 숭배하는 시대에 양극화 문제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행복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점점 더 부자와의 격차가 벌어지는 사회에서, 더욱더 부자가 되는 사람을 제외하고 누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부자라고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양극화 문제는 자본주의가 처음부터 품고 있던 문제였다는 것은 앞선 폴라니의 말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결국 두 개의 다른 민족이 생겨난 것이다. 전대미문의 부가 전대미문의 빈곤과 불가분의 하나라는, 당대의 사유하는 정신이라면 실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사태가 현실로 판명되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 역시 초기에 제시되었다. 그것은 기부이다. 폴라니는 벤섬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사회의 번영이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다수의 시민들은 자기들의 일상 노동 이외에는 별 자원이 없게 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항상 가난한 상태로 수렴해갈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이들의 결핍을 메워주기 위해 정규적인 기부제도가 확립되어야만 한다"고 제안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되면 "이론상으로는 결핍이 줄어들어버리기 때문에 결국 산업이 타격을 입을 것이다"고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산업을 위해서는 굶주림이라는 육체적 제재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결핍 상태를 증대시키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과제라는 것이다."
기부가 충분해서 결핍이 해소되면 갑싼 노동력 확보에 문제가 생기므로 정부는 결핍 상태를 어느 정도 유지해야 한다는 벤섬의 이야기는 다소 가혹해 보인다. "어느 정도"라고 했지만 실제로 벤섬은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냉혹하게 들리는 이 말에는 일말의 진실도 담겨 있다. 오늘날 빌 게이츠 같은 부자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기부하지만 좀처럼 가난이 해소되지 않는 현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29-130
[증여론]에 의하면 포틀래치에서는 파산할 정도로 베푸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한다. .... 이것은 무사무욕(無私無慾)한 행위는 아니다. "추장과 가신 사이, 가신과 그 추종자 사이에는 이러한 증여에 따라 위계서열이 확립된다. 준다는 것은 자기의 우월성, 즉 자기가 더 위대하고 더 높으며 주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답례하지 않거나, 더 많이 답례하지 않으면서 받는다는 것은 종속되는 것이고, 손님 또는 하인이 되는 것이며, 작아지는 것이고 더 낮은 지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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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축적은 양극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데 이를 완화하는 방책 중 하나가 기부이다. 하지만 기부는 결코 기본구조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포틀래치 같은 방식이 아니라면 기부는 공리주의의 술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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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와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기부가 받는 사람에게 모욕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매년 100명 정도가 굶어죽는다고 한다. 경제대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사(餓死)를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꽤 많은 사람이 자존심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로 등록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제도만으로 인간의 심리를 다스릴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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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염려는 마르셀 모스도 하고 있다. "자선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는 더욱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도덕적인 노력은 부유한 '보시가(布施家, aumonier)의 무의식적이며 모욕적인 후원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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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석산, 행복스트레스,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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